지난 UE6 행사 때 프로파간다 부스에서 '테스' 포스터를 샀다. 나스타샤 킨스킨의 날카로운 눈빛과 옅은 분홍색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테스'를 접한 건 훨씬 더 전인데 촌스러운 디자인으로, 누가봐도 8,90년대 느낌이 물씬 풍기는, '테스'라는 책이 오빠방 책꽂이에 있었다.오빠는 책을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 책을 누가 왜 거기에 꽂아놨는지는 의문이다. 어린 그때의 나는 독특한 느낌,에 잠깐 그 책을 펼쳐봤지만 읽지는 않았다. 아니 읽지 못했다고 하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테스'를 영화로 접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이 영화 중간에 잠깐 나오면서 나는 테스의 시대 배경을 유추할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시대였다. 벽돌집과 옅은 녹색의 집안 배경, 토마스 치펀데일이 생각나는 식탁 의자, 지주와 노동자의 옷차림, 증기 기계, 기차도 힌트였다. 이런 역사적인 접근 말고도 '테스'는 충분히 감정적인 접근도 가능하다. 비록 남자와 여자가 여전히 상하 관계로 묶여 있던 시대이긴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는 행위는 인간적인 공감이 가능하다. 알렉산더에게, 힘으로 순결ㅡ이라는 말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딱히 대체할 만한 단어가 없어서 사용한다ㅡ을 잃은 테스는 훗날 사랑하는 앤젤에게 과거에 대한 고백 편지를 쓰며 '그땐 어려서 잘 몰랐다'라고 용서를 구한다. 어려서,가 아니라 잘 몰랐다,는 말에 잠시 영화를 멈추었다. 순결 혹은 순결하지 못한 이유에 대한 변명 때문이 아니라 처음 사랑 할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첫사랑이란 무언가를 잘 몰랐을 때, 하는 사랑이 첫사랑이 아닐까 싶다. 그 무언가란 너무 많아 한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 부분이고. 지독히도 무지의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새로운 사랑을 할 때마다 상대방에 대해 무지한 상태인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그 무지와는 또 다르다. 비슷한 감정을 헷갈린다거나 심지어 감정 자체를 새로 배우는 것이 첫사랑 속 무지,의 형태다. 그래서 어쩌면 테스와 앤젤이 그렇게 고통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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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별에 대처하는 뇌의 자세'를 봤는데 무기력함-집착-분노 순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테스'에 나오는 이별,도 마찬가지였고 나 또한 역시 그랬다. 그런데 이 순서가 사랑에 빠졌을 때,에도 똑같이 나타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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